이 글은 한메일Express PM을 맡고 있던 2007년에 작성한 글입니다.

이때까지는 크게 이슈가 되지 않았으나, 현재는 인터넷 상의 '잊혀질 권리'는 중요한 주제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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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나와 메일, 그리고 '평생 쓴다'는 것에 대한 단상.

원글 : http://daummail.tistory.com/8 (2007년6월4일)

 

내 기억은 제한적이다. 1년, 2년, 3년, 그리고 10년이 지나면 모든 것은 앞뒤가 섞이며 밀가루 반죽과 같이 된다. 그러나 메일은 그 시간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진실의 이면들을 뒤에 품은채 표지처럼 글로 남아 있다. 그것은 관계의 기록이며, 시간의 기록이다.

1997년 나는 처음 한메일을 썼다(그때는 나는 다음 직원이 아니었다. 나는 작년 11월에 다음에 입사했다). 그때는 아마도 "평생 쓰는 무료 이메일"이라는 슬로건을 "평생 쓰는" 보다는 "평생 무료"의 의미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지금 나의 메일함을 보면 1999년부터 메일이 남아 있다(합이 2500통 정도가 된다). 그때는 용량이 적었기에 눈물을 머금고 이전의 메일들을 주기적으로 지워줘야 했기에 1997, 1998년의 메일은 사라진 것이다.

그런데, 10년의 지난 지금, 메일 서비스들은 모두 대용량 내지 무제한으로 가고 있다. 이 용량 경쟁도 언젠가는 거의 모든 메일 서비스들이 무제한 용량을 제공하면서 평정되게 될 것으로 예측할 수 있다. 이제 나는 내 메일을 일부러 삭제하지 않는 한 모든 메일들이 남아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은 어떤 의미를 띄는 걸까? 우리는 그동안 생각해보지 못한 새로운 질문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40년 뒤 나는 아마 생업에서 은퇴하여 여생을 자연 속에서 책이나 읽으면서 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때 나는 한메일에서 50년 전 메일들을 뒤적이면서 하나씩 기억들을 되새기게 될 것이다. 그리고 50년 전 친구가 보냈던 메일에 '답장'하기 버튼을 누르고 싶은 충동을 느끼면서 노스탤지어에 시달리게 될 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그 친구는 그때쯤이면 죽고 없을 지도 모를 일이니까.

2100년 즈음에는 나도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 수명이 130세까지 늘어난다고 하니 조금 더 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가 신이나 기계인간이 되지 않는 한 언젠가는 나 뿐 아니라 오늘날 한메일에 로그인한 모든 사용자들은 더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럴 때 "평생 쓰는 이메일"이라는 건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되는 걸까? 사람은 없는데 서비스 어딘가에 그 사람의 이메일이 보관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 이메일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걸까, 존재하지 않는 걸까? 이 메일이 있는 세상은 '이세상'일까 '저세상'일까?

사람이 죽으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가 지닌 소지품들은 모두 가족에게 남겨지게 된다. 우리는 유명한 작가가 사적으로 주고 받은 편지들이 그의 사후에 가족에게 상속되어 출판되거나 경매로 팔려나간 경우을 흔히 볼 수 있다. 그런데, 종이로 된 편지가 아닌, 아이디와 암호를 넣고 로그인해야 하는 이메일의 경우는 어떨까? 유명인이 죽고 난 후 그의 이메일을 가족이 유산으로서 상속받아 권리를 주장할 수 있을까? 논란의 여지가 있을지 모르지만 내 생각에는 그럴 권리는 아마도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만일 돈을 노린 이메일 도굴꾼이 망자의 이메일을 해킹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 행위는 적발하거나 처벌해야 할까?

어쩌면 미래에 새로운 보험 상품이 등장할 지도 모르겠다. 내가 죽거들랑 내가 썼던 모든 이메일을 자동으로 삭제해주는 보험 상품 말이다.

나는 상상해 본다. 죽은자들의 이메일들만을 담고 있는 서버들이 모인 서버실을. 온도 조절기가 갖추어지고 랙에 서버들이 나열된 모습은 아마도 납골당의 모습과 유사하지 않을까 싶다. 납골당에 뼈를 보관하는게 좋은지 아니면 이곳의 망자의 서버에 나의 이메일을 보관하는게 좋을지? 이 Dead E-mailer's Society를 위한 정기적인 합동 추모제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평생 쓰는 무료 이메일", 대용량에 이어 무제한 용량으로... 우리는 지금 이순간 우리의 어떤 한계를 넘어서고 있는지 알고 있는 걸까. 철저하게 사적이면서도 관계를 저장하는 메일... 무제한, 소멸되지 않는, 기억의 깃발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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