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11.28 한예종 예술경영 전정환 / 문화이론 수업 발표 |
미셸 드 세르토 Michel de Certeau (1925~86)
1925년 샹베리에서 태어났다. 1950년 예수회에 가입했고, 1956년 성직자로 임명되었으며, 1960년 소로본 대학에서 종교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근대 초기 종교사의 전문가가 되었으며 신비주의에 관한 연구를 시작했다. 그리고 68운동을 겪으면서 진로를 바꾸었다. 그의 저서는 이질적인 이슈와 독자를 대상으로 현대 사회와 이론에 관한 문제와 이슈를 다루기 시작했다. 자크 라캉의 프로이트 학교가 창립될 때부터 폐교될 때까지 회원이었으며, 그의 저술의 다양성은 그의 작업의 산물이자 비결이다. 1978~1984년에 캘리포니아에서 상근으로 일을 했다.
일상 생활의 실천 The Practice of Everyday Life
“드 세르토의 주요 관심은 '일상 생활의 창조적 실천성'이다. 그것은 인간이 사회 구조에 매몰되지 않을 가능성을 찾는다는 점에서 계몽주의나 자유주의의 전통에 섰다고 해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전통과 분명히 구별되는 새로운 시각을 연다. 그것은 인간의 가능성을 이성이나 자유 의지 등에서 찾지 않고 바로 '일상 생활의 창조성'에서 찾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푸코와도 구분된다. 판옵티콘에 훈육되고 종속되는 삶이 아니라, 주어진 판옵티콘을 정치적, 제도적인 차원이 아닌 '아주 일상적인 차원'에서 재전유, 왜곡, 변형, 재가공하면서 자신의 삶을 만들어 간다는 것이다. 그동안 큰 담론 속에서 배제되었던 일상 생활의 차원을 부각시켰다는 점, 그리고 그것의 저항성만이 아니라 적극적 창조성을 제시했다는 점에 드 세르토의 의의가 있다.”
- 판옵티콘(panopticon) : '모두'를 뜻하는 'pan'과 '본다'는 의미의 'opticon'을 합성한 말로, 죄수를 효과적으로 감시할 목적으로 만든 원형 감옥. 제레미 벤담이 설계.
- 세르토는 '소비자 consumers' 대신에 '이용자 users'라는 용어를 사용했으며 생산자와 소비자의 구분을 넘어서고자 했으며, 이용 과정에 감춰져 있는 이차적 생산에 주목했다. 원주민 인디언들의 스페인 문화 이용의 경우.
- 세르토는 연구의 주제인 발언행위의 관점을 취함으로써 발언행위를 특권화한다. 발언행위의 특징을 산책과 요리 같은 다른 많은 실천들에서 발견했다.
- 푸코의 ‘권력의 미시 물리학’에서 말하듯이 ‘감시’의 망이 미세한 어디로나 확장하고 명확해지고 있는 것이라면, 시급한 것은 전체 사회가 그에 환원되지 않을 방법을 찾아내는 것. 이용자들의 전술이 이상적인 극한까지 발전한다면, 감시에 대항하는 망을 이루게 된다는 것이 이 책의 주제.
- ‘전략’은 의지와 권력의 주체가 ‘환경’에서 분리될 수 있을 때 가능해지는 힘 관계의 계산을 의미한다. ‘전술’은 ‘고유 영역’에 의존할 수 없고 가시적 총체성으로서 타자와의 구분선에도 의존할 수 없는 계산을 의미한다. 전술의 장소는 타자에 속해 있고, 은밀히 침투시킨다.
- 많은 일상의 실천(대화, 독서, 산책, 쇼핑, 요리 등)은 성격상 전술적이다. 많은 ‘작용 방식ways of operation’이 있다. – 교묘한 트릭, 사냥꾼의 교활함, 즐거운 발견, 시적인 것 등
- 수사학 분야가 전술의 유형들 사이를 구분할 수 있는 모델을 제공한다.
도시 속에서 걷기 Walking in the City
The Practice of Everyday Life - Part III: Spatial Practices
참고 : WTC에서 내려다본 맨해튼
세계 무역 센터 110층에서 내려다본 맨해튼.
마천루의 요동이 시선에 사로잡혀 직물구조로 변한다.
순간순간 이전에 성취한 것을 바로 던져버리고, 현재만으로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도시.
조망하는 자는 이 도시 속에서 폭발하는 우주를 읽을 수 있다.
세계에서 가장 큰 글자들로 쓰여진, 소비와 생산의 과잉에 대한 거대한 수사.
“the tallest letters in the world compose a gigantic rhetoric of excess
in both expenditure and production.”
훔쳐보는 자와 걷는 자 Voyeurs or walkers
인간 텍스트들을 전체화totalizing하는 쾌락. 시점viewpoint이 되려는 욕망, 지식의 허구. 르네상스때 원경투시법에서 시작해서, 기술적 발전은 ‘모든 것을 보는 권력’을 조직해내었다. 파노라마-도시, 광대한 직물구조는 실천에 대한 망각과 오해를 통해서만 가능한 그림이다.
도시 아래는 가시성이 멈추는 일상 생활자들이 살아가는 곳이다. 유동적이고 서로 얽히는 글쓰기의 그물은 저자도 구경꾼도 없는, 궤적의 부서진 조각들과 공간의 변경으로 만들어지는 다중의 겹쳐진 이야기를 꾸민다. 세르토는 ‘기하학적’, ‘지리학적’ 공간과는 전혀 다른 공간 실천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주하는, 혹은 은유적인 도시는 계획되고 읽을 수 있는 도시라는 명료한 텍스트 속으로 살며시 들어간다.
“A migrational, or metaphorical, city thus slips into the clear text of the planned and readable city.”
1. 도시의 개념에서 도시적 실천으로
From the concept of the city to urban practices
개념 도시 conceptual city
에라스무스 曰, “도시는 거대한 수도원”. 조망적 시선과 예견적 시각은 불투명한 과거와 불확실한 미래를 수면에 띄워 올려 처리할 수 있다는 이중적 투사를 구성했다.
도시적 사실urban fact은 도시 계획적 이성에 종속된 통일체로 다룰 수 있다고 가정되었다. 도시를 계획한다는 것은 현실의 복수성plurality에 대한 사고 방식을 효과적으로 만드는 것, 즉 도시를 분절하는 법을 알고 또 실제로 분절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도시계획적 담론에 의해 건설된 도시는, 분류를 통해 차별화, 재배치하여 다룰 수 없는 모든 것들을 배제함으로써, 기능주의적 관리의 ‘폐기물들’(비정상, 일탈, 질병, 죽음 등)을 만들어낸다. 발전은 계속 증가하는 폐기물들을 관리할 수 있는 범위로 끌어들여 질서의 그물을 촘촘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변형시키고자 한다. 그러나, 이윤 체계는 손실을 발생시킨다. 체계 밖에서는 숱한 비참함과 가난의 형태로, 체계 안에서는 숱한 폐기물의 형태로, 끊임없이 생산을 ‘비용’으로 바꾸었다.
도시의 합리화라는 전략적 담론 속에서, 기능주의적 조직화는 ‘발전’(즉, 시간)을 특권화함으로써 도시를 가능케 하는 조건인 공간 자체를 망각하게 했다.
참고 :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는 이제 사라졌다. 하지만 40년 전 정부의 철거민 정책에 힘없이 떠밀려 왔던 세입자들은 그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개발의 그늘 아래 놓여 있다.”
오마이뉴스 - http://durl.me/6g76q6
도시적 실천 urban practices
개념 도시는 도시를 조직했던 절차와 함께 쇠퇴하고 있다. 우리는 발전 대신 파국을 얘기함으로써 특권을 유지하는 담론의 영역에 머무르는 대신, 도시 계획 체계가 관리했다고 생각했지만 살아남은 세균 같은 실천들, 즉 하나면서 다수인 실천들을 분석할 수 있다. 이들은 판옵틱 관리 속에서 제거되지 않고, 읽을 수는 없지만 안정된 전술에 따라 결합하여 일상적 규칙과 내밀한 창조성을 구성했다.
푸코의 권력 구조 분석은, 도제제, 보건, 법률, 군대, 노동 등에 있어, ‘세부 항목’을 조직화하는 것만으로도 인간의 다양성을 ‘훈육적’ 사회로 바꿀 수 있는, 모든 일탈을 관리하고 차별화하고 분류하며 위계화할 수 있는 기제와 기술적 과정, 즉 ‘미시적 권력 수단들’을 분석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훈육이 이루어지는 영역에서의 공간적 실천들이 훈육의 공간을 생산하는 이러한 장치들과 어떻게 상응하는가’라는 문제가 있다. 집단주의적 관리 양식과 이를 재전유하는 개인의 양식 사이에서 빚어지는 갈등이라는 맥락에서 볼 때, 이 문제는 중요하다. 세르토는 이 연구에서, 훈육 영역 밖으로 나가 훈육을 피하려 하지도 않으면서 이처럼 다양한 형태로 저항하고 꾀를 쓰는 고집스런 절차를 추적하고자 한다. 이는 우리를 일상적 실천과 관련이 있는 공간의 이론으로 이끌 것이다.
2. 여유로운 걸음들의 합창 The chorus of idle footsteps
“The goddess can be recognized by her steps” Virgil, Aeneid, I, 405
걷기는 수로 셀 수 없다. 그 개미 떼 같은 움직임의 덩어리는 특이성singularities의 셀 수 없는 집합이며, 장소들을 엮어 직물처럼 짜내고 있다. 보행자의 움직임은 “그 존재가 사실상 도시를 만들어 내는 실재 체계들” 가운데 하나를 형성한다. 지리학적 체계는 걸어가는 작용을 투사하여 무시간 속에 읽을 수 있는 그림표상으로 변형시키기는 하나, 실재하는 지나가는 행위 자체를 망각시킨다
참고: 실시간교통-다음지도(좌), 서울 Timelapse–Mr.Koo http://vimeo.com/49360706 (우)
보행자의 발언 행위 Pedestrian speech acts
걷기와 말하기의 비교를 통해, 걷기를 공간에서의 언술행위enunication로 정의할 수 있다.
걷기의 기본적 ‘언술적’ 기능은 다음과 같다.
1) 걷기는 걷는 사람이 공간배치 topological 체계를 전유appropriate하는 과정이다. (말하는 자가 언어 체계를 전유하듯이)
2) 걷기는 장소의 공간적 실현이다. (말하는 행위가 언어 체계의 청각적 실현이듯이)
3) 걷기는 구분된 위치들 간의 관계, 다시 말해 움직임의 형태를 띤 실용적 ‘계약’이다. (구어 발언 행위가 ‘상대방을 설정하고’, 말로 소통하는 사람들 사이의 계약을 하듯이)
보행자의 발언 행위는 다음 특성들 때문에 공간적 체계와 구분된다.
1) the present : 공간적 질서가 가능성(다닐 수 있는 장소)과 금지(다닐 수 없는 장벽)의 앙상블을 조직한다면, 보행자는 이러한 가능성들의 일부를 나타나게 하고 존재하게 한다. 보행자는 가능성들을 변형시키거나, 다른 가능성들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걷기에서 가로지르기, 이리저리 표류하기, 혹은 즉흥적인 행위. 구축된 질서가 고정시킨 가능성들 가운데 몇몇만을 실현하기도 하고(이 곳으로만 가고 저 곳으로는 안 가는 경우), 가능성들의 수(지름길이나 우회로를 창조함으로써)와 금지의 수(통과하는 것으로 간주된 길을 스스로 금지 구역으로 설정하는 경우)를 증대시키기도 한다.
2) the discrete : 공간적 언어의 기표들 가운데서 선택하거나 자신의 이용법으로 대체함으로써 분별을 만들어낸다.
3) the phatic : 보행자는 그의 위치와 관련하여 가까운 곳과 먼 곳, 여기와 저기를 구성한다. 이런 위상(여기와 저기)은 ‘나’와 관련된 타자를 끌어들임으로써 장소들 간의 접합적이고 분리적인 분절을 형성하는 기능이 있다. 걷기 행위 속에는 ‘친교적phatic’ 측면이 있다. 길을 따라가기도 하고 누구에 앞서 가기도 하는 걷는 행위는 친교적 표현을 만든다.
걷기의 수사학 Walking rhetorics
말의 비유적 표현과 걷기의 비유적 표현 사이에는 상동성이 있을 것이다. 공간적 실천을 설명하는데 중요한 문체적 비유법은 제유법synecdoche와 연사생략 asyndeton이다. 제유는 부분으로 전체를 대표하는 것이다. 하나의 오두막집이나 언덕도 공원을 대신할 수 있다. 이는 하나의 공간요소를 확장하여 더 큰 것의 위치를 차지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연사생략은 한 문장이나 문장 사이에 있는 접속자나 부사 같은 연계어를 생략하는 것이다. 음절탈락을 통해 '더 작은 것'을 창출하고 공간적 연속체에 틈을 벌리며, 선택된 일부만을 붙든다. 제유는 전체를 조각들로 대체하고, 연사생략은 접속하는 것과 연속하는 것을 제거함으로써 각 조각들을 분리시킨다. 이러한 걷기의 수사학을 통해 (병렬적 인용으로 구성된) 유비적 analogical 유형과 (틈, 착오, 암시로 만들어지는) 생략적 elliptical 유형이라는 기본적인 공간적 진술이 창출된다.
움직들의 수사학적 이동은 도시 계획의 분석적이고 수미 일관한 고유 의미를 밀어내고 대체해 버린다. 이는 대중들에 의해 생산된 ‘의미의 방황’이다. 이 대중들은 도시의 어떤 부분은 사라지게 하고 다른 부분은 과장함으로써 도시를 왜곡하고, 잘게 부수어 버리며, 그 완고한 질서로부터 도시를 빼돌린다.
3. 신화들 : ‘이동하게 하는’ 것 Myths : what “makes things go”
움직임의 비유들(제유, 연사생략 등)은 ‘무의식의 상징적 질서’와 ‘담론에서 드러나는 전형적 과정들’의 특징을 나타낸다. ‘담론’과 ‘꿈’ 사이의 유사성은 둘 다 ‘문체적 절차’를 사용한다는 것이다(‘꿈꾸기’ 특유의 형상화 과정에는 응축과 치환이 있다). 보행 과정을 언어적 형성 과정에 비유한 것처럼, 보행 과정을 꿈의 형상화에 비유할 수 있다. ‘무엇이, 공간적 실천에 있어, 꿈꿔 온 장소와 분리할 수 없는가’를 발견할 수 있다. 걷는다는 것은 장소를 잃는 무한한 과정이며, 고유한 것을 찾아가는 무한한 과정이다.
이름과 상징 Names and Symbols
장소가 제공하는 정체성은 이름으로 불린 상징이다. 공간적 실천은 고유명사를 조작함으로써 부재를 즐긴다. 걷기의 방향(sense)과 말의 의미(sense) 사이의 관계는 두가지 분명히 상반되는 움직임, 즉 하나는 외향적인(걷는다는 것은 밖으로 나간다는 것), 다른 하나는 내향적인 움직임(기표의 안정성 아래에서의 유동성)을 설정한다. 고유명사는 친밀한 의미저장소를 만들어낸다. 고유명사는 ‘의미 있게 만든다.’ 고유명사는 움직임의 추동력이 된다. 고유명사는 장소에 비장소를 만든다. 즉, 고유명사는 장소를 통로로 바꾼다. 별 광장, 콩코드 광장, 어시장 광장 등의 이름들은 여정을 이끄는 별들이다. 고유 명사들은 행위와 걸음을 연결하고 의미와 방향을 열면서, 그 일차적 역할을 비우고 닳아 없애는 이름 그 자체로 작용한다. 의미의 남겨진 유물들, 아무것도 아닌, 혹은 거의 아무것도 아닌 사물들이 보행자들의 걸음을 상징화하고 방향을 이끈다.
이 같은 상징화의 핵심 속에서 공간적 실천과 의미화 실천을 관계짓는 세 가지 구분된(그러나 연관된) 기능이 성립된다.
첫째, 믿을 만한 것 : 공간적 전유화를 ‘승인하는’(가능케 하거나 보증하는) 것,
둘째, 기억할 만한 것 : 공간적 전유 과정에서 침묵해 있고 깊숙히 박혀 있는 기억으로부터 -반복되는(혹은 회상되는) 것,
셋째, 원초적인 것 : 공간적 전유 안에서 구조화되고 유아 때의 연원으로부터 꾸준히 넘어오는 것이다.
믿을 만한 것과 기억할 만한 것 : 거주할 만함
Credible things and memorable things : habitability
사람들을 믿게 하는 담론은, 명백한 패러독스에 의해, 사람들에게 믿으라고 강요한 바로 그것을 빼앗아 버리거나 그것이 약속한 바를 결코 전달해주지 않는다. 이런 담론은 빈 것을 위한 공간을 만들고 한정된 장소들의 체계 안에서 유희를 ‘허용하고’, 유희공간에서의 생산을 ‘승인한다.’ 이런 담론은 장소를 거주할 만한 곳으로 만든다. 이런 점에서 세르토는 그런 담론을 ‘지방 당국local authority’라고 부른다. 지방 당국은 기능주의적 전체주의 체계의 틈이다.
이야기와 전설이 뿌리 뽑히면 도시에서는 ‘상징 질서가 중단된다.’ 나 자신의 집을 빼 놓고는 어떤 특별한 장소도 없게 되며, ‘더 이상 믿을 것이 없는 장소들’만이 있게 된다. 걸어다니기와 여행은, 일상에서 벗어나 나갔다가 돌아오는 행위, 즉 오늘날의 장소에는 없지만 과거에는 쉽게 접할 수 있었던 전설 덩어리를 대체하고 있다. 그것은 꿈이나 보행 수사학처럼 응축과 치환의 효과라는 이중 성격을 갖는 소설이다. 이러한 의미화 실천은 공간을 창조하는 행위로서 매우 중요하다. 이 실천의 내용은 계시적인 것으로 남아 있다. 장소에 관한 이야기들은 임시변통의 것들이다. 잃어버린 이야기들이나 불투명한 행위들과 얽힌 이야기를 꾸미는 말의 유품들은, 그들 사이의 관계는 고려되지도 않은 꼴라주 속에 같이 높여지며, 그런 이유로 상징적인 온전함을 형성한다.
이야기가 열어 놓는 확산의 과정 때문에 이야기는 소문과 다르다. 소문은 항상 명령적이고, 사람들에게 뭔가를 믿게 함으로써 질서를 강화하는 통상적 움직임의 창조자이다. 이야기는 가지를 늘리지만, 소문은 전체화한다. 이야기는 사적으로 되며 이웃, 가족, 혹은 개인 속으로 가라앉는 반면, 미디어에 의해 선전되는 소문은 모든 것을 포괄하며 ‘도시’라는 위용아래 전능한 언어이다.
이야기가 퍼진다는 것은 기억할 만한 것이 퍼진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이것은 반박물관anti-museum적인 것이다. “기억은 우리를 그 장소에 얽어맨다. 그것은 사적인 것이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흥미롭지 않을 수도 있지만, 한 구역에 영혼을 부여하는 것은 결국 그 기억이다.” 영혼들이 출몰하는 장소에만 사람들은 살아갈 수 있다. 이 때문에 판옵티콘의 체계는 뒤집힌다.
장소는 조각 난 것들이며, 내부로 돌아드는 역사이고, 남들은 읽을 수 없는 과거이며, 펼칠 수는 있지만 이야기처럼 보따리 안에 축적된 시간이며(수수께기 같은 상태로 남아 있는), 육체의 고통과 기쁨 속에 감싸인 상징화이다. “나는 여기서는 기분이 좋다.” 언어 속에서는 거의 표현되지 않지만, 어느덧 지나가는 희미한 불빛처럼 나타나는 행복well-being, 그것이 공간적 실천이다.
[출처] Michel de Certeau 'Walking in the City' |작성자 박진호
참고 : Facebook에서 인용 – Yumi Kang, 한예종 미술이론과
신세대미술에대해 쓰자니
서태지, 압구정동, 오렌지족에서 시작해
삐삐, 하이텔, 락카페, 운동권, 낑깡족,
《압구정동:유토피아/디스토피아》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키워드들이 쏟아져 나온다.
혹자들에게 압구정은
'부르조아의 퇴폐적 향락적 성향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더러운 곳'이었고,
누군가에게는
'부모잘만나 잘사는 빌어먹을 어린것들이 성적으로 문란하게 살아가는 말세의 단편'이었으며
누군가에게는 '신천지'로 '유행의 최첨단'이었다.
누군가에게는 '비가오면 가야하는 곳'이었고,
또 누군가에게는 '유토피아인지 디스토피아인지' 모르겠지만 '키치가 넘쳐나는 가짜세상'이었다.
그러나 그곳은 진짜세상이었다.
방문자들에게 그곳이 어떻게 보였는지는 모르지만, 중고등학생시절의 내가 떡볶이를 사먹거나, 방과후 버스를 기다리거나, 수업에 필요한 물건을 사는 곳이기도 했고,
친구집에 가는 길이자, 고등학교 동아리 모임을 하는 곳이었고, 산보자가 되어 누릴 수 있는 도시의 전부이기도 했다.
우리는 방문객을 바라보며 낄낄거렸다.
한껏 이상한 바지와 셔츠를 차려입고
배꼽티에 생머리 휘날리는 날티나는 여자를 꼬시는 누가봐도 압구정인이 아닌 대학생 언니오빠들을 바라보며 촌스럽다고 낄낄댔고,
연예인을 보겠다며 길거리에 죽치고 앉아있는 한 무리의 소녀들을 바라보며
저것들은 지 아부지가 지들 먹여살리려고 출장갔다와도 공항에 안나가는 것들이 여기서 이러고 있다고 혀를찼다.
우리에게 압구정은 생활의 공간이자
캠프의 공간이었다.
맞다. 그곳은 캠프의 공간이었다.
압구정 처음 와 보는마냥
차려입고 돌아다니는 사람을 비웃기라도 하듯
차라리 초록색 체육복에 쓰레빠를 신고 돌아다녔다.
이곳이 우리의 영역임을 과시라도 하듯
당신의 유토피아 혹은 디스토피아가
우리에겐 생활의 공간임을 거들먹거렸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방문자들이 말하는 페스티브한 공간이 아니었다.
압구정동은
우리에겐 진짜 삶의 공간이었다.
출근을 하던 친구의 아버지들이
어느날 갑자기 돌아올 수 없게 된
죽음의 공간이었고,
그들의 아버지를 위한 한 송이 꽃을 사는 공간이기도 했다.
1990년대 서울의 20대는,
그리고 기성세대는
왜 그토록 압구정에 미쳤던걸까.
재미있는 부분이긴 하다.
그러나 그곳에
그들이 말하는 수많은 문제들이
정말 존재했는가는 다른 이야기이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과
그곳에 머물러 가는 사람들은
너무도 달랐고,
어찌보면 기사속의 이야기는 우리에겐 소설과도 같아서 웃음이 날 정도였다.
물론 그 공간속을 살던 이십대의 이야기는 잘 모르지만,
건너건너 친구의 언니나 오빠들의 이야기밖에는 모르지만,
압구정은 웃기는 동네였다.
지금은 다 죽어버린 고스트타운이라도.
어쩌면 모두가 관심을 끄고 난
이제부터가
내가 살았던 그 압구정의 재발견이 이루어질 때가 아닐까 한다.
나는 압구정을 좋아한다.
그곳이 어떤 곳이건 간에. |
어린아이와 장소의 은유 Childhood and metaphors of places
주체성은 개체를 실존으로 구축하고 ‘거기 있는 것’, 즉 현존재Dasein로 만든 부재와 이미 연결되어 있다. 거기 있는 존재being-there는 오직 공간적 실천 안에서만, 즉 무엇인가 다른 것으로 움직이는 방식으로만 작동한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결정적이고 원초적인 경험, 즉 어린아이가 엄마의 몸으로부터 분화된 경험이 다양한 은유를 통해 반복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프로이트가 18개월 된 손자의 실타래 놀이를 연구한 것. 실타래를 던지면서 ‘저기!’라고 했고, 실타래에 감긴 줄을 끌어당기면서 반기며 ‘여기da!’라고 소리쳤다. 엄마의 몸과 분리된 과정을 기억하는 것. 이 조작은 ‘원초적인 공간적 구조’이다.
거울 앞에 선 어린아이가 다른 것(아이가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는 이미지 그것)이 아닌 자기 자신(전체적으로 본 그녀 혹은 그)을 보게 되는 행위에서, 중요한 것은 존재의 법칙이자 장소의 법칙으로서 타자로의 이행을 각인하는 ‘공간적 사취’이다. 따라서, 공간을 실천하는 것은 어린 시절의 즐겁고 조용한 경험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그것은 한 장소에서 타자가 되는 것이며 또한 타자로 옮겨 가는 것이다.
공간적 실천을 결정하는 유아시절의 경험은 계획된 도시 안에 ‘은유적인’ 혹은 움직이는 도시를 창조한다. 칸딘스키가 꿈꾼 것처럼, “건축의 모든 규칙에 따라 세워지고 난 후, 느닷없이 모든 계산에 반항하는 힘에 의해 흔들리는 거대 도시”
“a great city built according to all the rules of architecture and then suddenly shaken by a force that defies all calcluation.”, Kandinsky
참고 : 시사IN 제314, 315호 별책부록 <근대문화유산 도시여행>
참고 : 자본주의적 공간 형성에 대한 단상: 독점과 일상생활의 변화를 중심으로 강정석, 하자센터 협력기획팀, 영상원 간사 / 문화과학 2013년 봄
P88~90
<화차>의 차경선은 신용 문제에 따른 불법채권추심과 결부된 극단적인 경우에 속했던 것일 뿐, 본질적으로는 우리들과 별 차이가 없다. 결국 그녀와 우리들이 다를 바 없다는 뜻이다. 영화 속 그녀의 마지막 선택은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어떠한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해서, 세르토가 말한 체계에 균열을 낼 수 있는 일상생활에서의 창조적 실천의 가능성은 어디서부터 시작할 수 있을 것인가? 이는 앞으로 우리들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하고도 시급한 물음이 될 것이다.
이러한 가능성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데이비드 하비는 <희망의 공간>에서 이러한 가능성의 담지자, 저항의 주체를 ‘반란적 건축가’라는 특정한 ‘인물’을 통해 설명한다. 하비가 생각하는 건축가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건축가는 역사적으로 유토피아적 이상(특별히 공간적 형태에 관한 이념이 아닐지라도)의 생산과 추구에 깊이 관여되어 있다. 건축가는 인간적이고 심미적 상징적인 의미와 더불어 사회의 효용을 부여할 공간을 만들어간다. 건축가는 장기적인 사회적 기념물들을 형성하고 유지해 나가며, 개인과 집단의 갈망과 바램의 물질적인 형태를 부여하려고 노력한다. 그는 또한 새로운 가능성을 위한 공간, 즉 사회생활의 미래 형태를 위한 공간을 펼치기 위하여 투쟁한다.” – 데이비드 하비, <희망의 공간: 세계화, 신체, 유토피아>
하비는 또한 건축가는 특정한 전문가 개인이 아니라 ‘인물’임을 강조한다. 이는 “우리 모두 자신을 일종의 건축가로 볼 수 있음”을 의미하는 은유적 표현이다. 우리들 스스로의 운명과 행운, 그리고 환경을 스스로 ‘건축’해 나간다는 의미에서이다. 결국 그가 제시하는 ‘반란적 건축가’는 바로 우리들 스스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주체가 거시적 맥락에서 세르토가 말하는 ‘개념 도시’의 관점으로 설계하고 구획한 건조한 개발 환경에 저항할 수 있으며, 또한 미시적 관점으로 일상생활을 자본주의적으로 체화시키는 여러 세밀한 자본주의적 장치들에 균열을 낼 수 있는 주체라고 할 수 있다.
(중간 생략)
우리들 스스로가 ‘반란적 건축가’가 됨으로써 자기 주변의 환경을 바꾸고, 타인의 환경을 바꾸며, 더 나아가 모두를 위한 공공성을 추구하는 환경을 스스로 건축해야 한다. 앞서 언급했던, 자본주의적으로 주조된 아파트 단지의 ‘상상의 공동체’가 아닌, 지역과 동네, 마을에서 서로 경험을 공유하며 마음을 나누면서 만들어지는 ‘진짜 공동체’가 필요하다. 반란적 건축가가 만들어야 할 건축물은 외형적인 구조물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더욱 중요한 것은 사람과 사람이 화폐를 매개로 하지 않고 만날 수 있는 특정한 기회와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다. 이를 위한 실천적 행위가 일어날 때, 우리는 자본의 거시적, 미시적 체계로부터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
참고 문헌
Michel de Certeau, <The Practice of of Everyday Life>
박명진 외, <문화, 일상, 대중 – 문화에 관한 8개의 탐구>
마이크 크랭, 나이절 스리프트, <공간적 사유>
오마이뉴스, '난곡 재개발 열매' 누가 챙겼나 원주민 재정착률 8.8%의 '그늘', 2006.10
Mr. Koo, Timelapse – Fantastic Seoul, http://vimeo.com/49360706
Yumi Kang, Facebook post
시사IN 제314, 315호 별책부록, <근대문화유산 도시여행>
문화과학 2013 봄, <어소시에이션과 문화자립>
함께 읽으면 좋을 책
박해천, <콘크리트 유토피아>
이 푸 투안, <공간과 장소>
볼프강 쉬베부시, <철도 여행의 역사>
written by 전정환 - 미셀 드 세르토 <일상 생활의 실천> 발제 - 2013 한예종 문화이론 수업